일본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조선과 명나라로 돌렸다. 조선은 일본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활약 덕분에 멸망을 막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명량'이라 불리는 해전이 있었다. 영화로 명량 해전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의 조선 침략 및 이순신의 고난
임진왜란 발발 이전, 일본은 전국시대 이후 대통합을 이루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천합 폐하가 됐고, 이 인물을 중심으로 일본은 사실상 이때부터 한 국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전국 곳곳에 엄청 많은 위대한 장수들이 대거 포진했기 때문에, 언제든 반란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장수들의 주의를 자기 자신이 아닌 해외로 돌리고자 하였고, 당시 중국이었던 명나라로 진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보냈다. 명나라로 가기 전, 보급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땅을 침략하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첫 과제였다. 그래서 일본은 먼저 조선과 전쟁을 벌이게 됐고, 파죽지세로 부산부터 한성(서울), 그리고 그 이북의 땅까지 점령하게 됐다. 하지만 유독 전라도 땅만 수복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 수군을 번번이 막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일본이 순식간에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6년이 지난, 임진왜란 6년 1597년 일본 군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비친 구루지마(류승룡)를 왜군 대표 수장으로 삼았다. 이때 이순신(최민식)은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잠깐 빌려 온다면, 임진왜란 당시 왕으로 지내고 있던 선조는 이순신의 활약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선조의 주변 정치인들이 이순신이 자신의 활약을 힘 입어 역모를 꾸민다고 거짓말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난만 다녔던 선조는 백성들에게 수많은 비난을 받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순신의 활약은 선조의 입장에서 그리 좋지 않았다. 따라서, 주변 정치인들의 이러한 간언에 의해 이순신을 해당 보직에서 파면하고 고문을 하는 등의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파면된 이후 일본 수군에게 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조선 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사기가 떨어진 조선 군대 그리고 이순신의 명언
이순신이 파면된 상태에서 일본 수군과 많은 전투를 치른 조선 수군은 엄청난 패배를 연이어 기록했다. 전투 속에서 수많은 병력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해군에게 있어 중요한 전략 자산인 배가 12척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의 비밀 병기라 할 수 있는 거북선은 한 대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안 좋은 상황 들오 인해 조선 수군 인원들은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이뿐만 아니라 군대에서 도망치는 등의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악재 속에서 일본 수군과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그 아무리 뛰어난 이순신 장군조차도 답이 없다고 파악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사기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을지 모색했다. 조선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 본인의 근무지로 간 이순신은 사기가 저하된 조선군의 모습을 보고 이러한 두려움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전장에 나가게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조선 수군 전 인원을 바다 앞에 집결시키고, 그들이 자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불태웠다. 그러면서 그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명언을 말했다. 즉, 전투의 기본을 말하면서 병력들이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병사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켜 준 것이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과 싸우러 출전한다.
치열한 전투와 승리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 수군 자산은 별로 좋지 않았다. 거북선까지 포함하여 13척의 배를 보유한 조선 수군과 달리, 일본 수군은 수백 척의 배를 보유했다. 실질적으로 조선 수군이 이길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선 바다에서 싸운다는 전형적인 장점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과 싸울 경우 상대적으로 유리한 바다의 위치로 유인했다. 조선 수군을 만만하게 본 일본은 이러한 조선의 유인책을 무시하고, 양으로 이기고자 무작정 나갔다. 그러나 일본 수군의 자신감과 달리 조선 수군은 13척의 배와 바다의 흐름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조선 수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이기게 됐고, 일본 수군은 거의 전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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